SF라는 장르를 떠올리면 먼저 낯선 기술이나 광대한 우주, 차가운 논리부터 연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김초엽 작가의 작품을 읽고 나면 오히려 반대의 인상이 남는다. 분명 인공행성과 사이보그,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설정이 등장하는데도, 책을 덮고 나서 떠오르는 감정은 서늘함이 아니라 온기에 가깝다. 왜 그의 SF는 유독 다정하게 읽히는 것일까.
김초엽 작가의 소설은 차가운 과학 기술 자체보다 그 곁에 있는 인물들의 관계와 소통하려는 마음에 초점을 맞춰 온기를 전합니다. 로봇이나 사이보그 같은 비인간 존재들에게도 다정한 시선을 나누어 주며, 상실과 그리움이라는 보편적인 정서를 잔잔하게 풀어내 독자들에게 깊은 여운을 선사합니다.
이 글의 순서
- 기술보다 관계를 먼저 그리는 방식
-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도 나누어 주는 마음
- 데뷔작이 보여주는 세계관의 원형
- 상실을 다루는 방식이 남기는 여운
- 이후 작품들로 이어지는 확장
- 김초엽 작가를 처음 읽는다면
기술보다 관계를 먼저 그리는 방식
많은 SF 작품이 신기술의 작동 원리나 미래 사회의 시스템을 정교하게 구축하는 데 공을 들인다. 반면 김초엽의 소설은 기술 자체보다 그 기술 곁에 있는 존재들의 감정과 관계에 무게를 둔다. 우주선이나 인공지능이 등장하더라도, 이야기의 중심은 늘 누군가와 누군가 사이의 거리, 혹은 그 거리를 좁히려는 마음에 있다.
이런 태도는 작가가 생화학을 전공했다는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과학적 설정을 다룰 때는 정교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 설정을 인간(혹은 인간이 아닌 존재)의 감정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기술은 배경이고, 진짜 이야기는 그 기술 안에서 누가 외로웠고 누가 누군가를 그리워했는지에 있다.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도 나누어 주는 마음
사이보그와 안드로이드가 놓이는 자리
김초엽의 세계에는 로봇, 사이보그, 혹은 정체가 불분명한 존재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한 도구나 위협적인 타자로 소비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받을 수 있고, 기억을 붙들고 있으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존재로 그려진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뚜렷하게 나누기보다, 그 경계 위에서 흔들리는 존재들에게 똑같은 온도의 시선을 보낸다.
소통이 끊어진 존재들 사이의 연결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보이는 존재들 사이에서도 어떻게든 연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언어가 다르고, 감각 기관이 다르고, 심지어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방식이 달라도,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야기의 핵심 동력이 된다. 이 과정은 쉽게 해결되지 않고 종종 실패하거나 불완전하게 끝나지만, 그 미완의 상태가 오히려 현실적인 여운을 남긴다.
데뷔작이 보여주는 세계관의 원형
김초엽 작가는 한국과학문학상을 통해 이름을 알렸고, 이후 여러 단편을 묶어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펴냈다. 이 책에는 기억을 잃어가는 인물, 오랜 시간 떨어져 있던 존재들,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이들이 다시 만나거나 끝내 만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특히 눈에 띄는 지점은, 만남과 이별을 다룰 때 과장된 사건보다 잔잔한 정서의 축적을 선택한다는 점이다. 극적인 반전으로 독자를 놀라게 하기보다, 인물들이 서로를 향해 조금씩 다가가거나 멀어지는 과정을 세밀하게 따라가면서 감정의 결을 쌓아 올린다. 이 데뷔작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서와 태도는 이후 작품들에서도 일관되게 이어지는 세계관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상실을 다루는 방식이 남기는 여운
김초엽의 소설에서 상실은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지만, 그 방식이 자극적이지 않다는 점이 특징이다. 누군가를 잃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이후 남겨진 사람(혹은 존재)이 상실을 어떻게 안고 살아가는지에 더 오래 머문다. 슬픔을 극적으로 폭발시키기보다,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방식으로 다룬다.
이런 서술은 독자에게도 비슷한 리듬의 감정을 요구한다. 단숨에 몰아치는 카타르시스보다, 다 읽고 난 뒤에도 한동안 마음에 남아 있는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쪽에 가깝다. SF라는 장르적 장치를 빌려 오지만, 결국 이야기가 겨냥하는 것은 상실과 그리움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점에서 독자층이 SF 애호가에 국한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후 작품들로 이어지는 확장
첫 소설집 이후 발표한 장편에서는 무대가 한층 넓어진다. 붕괴한 생태계나 위기에 처한 공동체처럼 더 큰 규모의 배경이 등장하지만, 그 안에서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은 여전히 개별 존재들 사이의 관계와 신뢰다. 배경이 확장되었다고 해서 정서의 결이 달라지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데뷔작에서 세워둔 세계관의 뼈대가 이후 작품에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독자 입장에서도 의미가 있다. 어느 작품을 먼저 읽더라도 비슷한 온도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고, 반대로 여러 작품을 이어서 읽을 경우 하나의 세계관이 조금씩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도 얻을 수 있다.
김초엽 작가를 처음 읽는다면
SF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도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이 작가의 강점이다. 복잡한 과학적 설정을 이해하지 못해도, 인물들 사이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충분히 이야기를 즐길 수 있다. 처음 접한다면 여러 단편이 묶여 있어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부터 읽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각 단편이 비교적 짧아 완독 부담이 적으면서도, 이 작가 특유의 다정한 세계관을 골고루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